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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해 ‘이후’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힘
    친족성폭력을 말한다 2013. 12. 17. 13:54

    피해 ‘이후’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힘
    ‘친족성폭력’ 이야기⑤ 피해경험과 함께 살기

    향심

     


     
    ‘피해자는 어떤 후유증을 겪는가’라는 질문
     

    ▲ 은수연의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기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벗어난 뒤에도 기다란 칼이나 화살처럼 내 가슴에 푹푹 박혀 있는 기억들은 계속 예측하지 못한 곳곳에서 나를 아프게 쑤시고 올라왔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73p.
     
    친족성폭력 피해 경험을 책으로 펴낸 은수연은 성폭력 피해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고통이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생존자에게 남겨진 기억과 감정들은 피해에서 벗어난 ‘이후’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또 다른 고통을 만든다.

     
    흔히 ‘어떤 일을 치르고 난 뒤에 생긴 부작용’(네이버 국어사전)을 후유증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친족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생존자들은 어떤 후유증을 어떻게 겪게 되는가. 후유증은 피해 이후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요소일까. 친족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이후에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를 고민할 때, 이 후유증에 대한 걱정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친족성폭력 피해 경험을 연구한 자료들은, 가장 가까운 보호자에 의한 피해이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치명적인 외상을 남기게 된다고 말한다. 피해자는 보통 우울, 불안, 대인관계 문제, 자살, 자살 충동, 자해, 타인에 대한 불신감, 소외감, 분노감, 순결 상실감, 남성 혐오, 성적 의존과 거부 등 다양한 심리적 어려움을 보인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나 심한 경우 성격 장애로 진단을 받고 필요한 치료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피해자와 함께하는 쉼터 활동가인 나에게 가장 곤란한 질문은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이 어떤 후유증을 겪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이러한 ‘후유증’을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하지 않기도 한다는 모호한 것이었다.

     
    이 모호한 답의 시작은 친족성폭력이 특정할 수 있는 ‘어떤 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친족성폭력은 일상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생존자들에게는 일상적이거나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일로 여겨진다. 생존자들의 피해 경험은 생활 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보통 집을 벗어난 친족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은 주거 공간을 옮기고, 기존의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집을 벗어난 이후에 피해자는 예전과는 다른 주거지와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생활 환경이 크게 바뀌는 것이다. 친구나 선생님, 지역 자원 등의 사회적 관계 역시 단절된다. 동시에 그동안 겪어왔던 성폭력을 ‘해결’하고 ‘치유’해야 하는 큰 과제를 마주한다. 생존자들은 특정 사건을 경험하고 ‘원래’의 환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급변한 환경 속에 놓이게 된다.

     
    생존자들은 생활 환경의 변화가 주는 혼란감과 적응 문제 때문에 집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하거나 편해지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피해 이후와 환경의 급변함을 동시에 겪어야 한다. 이 글은 새로운 환경에 필요한 새로운 적응 방법을 발견해 나가지만, 여전히 과거의 경험과 습관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내는가, 두 모순된 시간이 공존하는 경계의 시간을 사는 생존자들의 전략을 통해 피해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려 한다.

     
    다 내 잘못인 줄 알았는데…‘피해’의 발견

     
    “그냥 일단은 그 상처를 인지했다는 자체가 커요. 전에는 아예 몰랐거든요. 그냥 다 내 잘못이고, 내가 나빠서 생긴 일이라고 느꼈어요. 친척들도 아빠도 나에게 다 (집 나간) 엄마 닮아서 그런 거라고 비난했으니까. 집에 있을 때 왜 내가 친구들보다 예민하고 생각이 많은지, 남자친구한테 왜 그리 집착하는지 늘 나 자신이 이상했어요. 이제 원인을 알게 된 거잖아요. 지금 제 모든 행동이 성폭력 ‘트라우마’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일이 있어서 그랬구나. 제 자신이 더 이해돼요.” (나현)

     
    “저는 아직 제가 피해자라는 사실이 너무 중요하고 무겁게 느껴지거든요. 지금은 피해자라는 걸 숨기기보다 오히려 그런 걸 다 얘기하고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내 상처를 진짜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들 만나고 싶어요.” (소라)

     
    나현은 중학교 때부터 5년여 간 함께 살던 삼촌에게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 중학교 때 처음 피해가 있고 여러 번 가출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아빠에게 잡혀 들어왔다. 우연히 피해 사실을 알게 된 남자친구의 도움으로 열림터에 오게 되었다.

     
    나현의 일탈행동이 반복되자 가족들은 나현이 엄마의 나쁜 행실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비난했다. 나현은 역시 자신이 또래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엄마의 영향인지, 삼촌의 성폭력 때문인지, 자신이 진짜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인지 늘 의심하고 걱정했다. 자신의 힘듦을 설명할 언어가 없던 나현에게 ‘트라우마’는 그간의 혼란과 모호함을 정리할 수 있게 했고, 성폭력이 그 원인이었음을 인식하게 해주었다.

     
    9년간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하다가 맨발로 집을 뛰어 나왔던 소라도 나현과 비슷한 전략을 취한다. 소라는 학교에서 성폭력 개념을 배웠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성폭력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성폭력은 피해자가 싫다고 하는데도 강제로 당하는 것이라고 들었지만, 자신의 경우에는 강제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림터에 오게 되면서 아빠의 행동이 성폭력임을 인식하게 된 소라는 뒤늦게 과거의 경험을 피해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은 소라에게 의미 있는 발견이다. 소라는 피해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확인 받고 싶어하면서,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생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피해’ 혹은 ‘트라우마’로 의미화하는 것은 중요한 과정이다. 이상한 일 혹은 기분 나쁜 일로 생각했던 경험에 사회적인 이름이 생기면서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게 된다. 사회적 명명을 통해 성폭력으로 인한 고통은 이제 남들도 알고 이해해주는 사회적 경험이 된다. 사회적 경험이 된다는 것은 타인과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 피해자를 지지하고 이해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장이 열리는 것을 뜻한다.

     
    급격히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기, 갈등하기

     
    그러나 생존자들의 ‘피해’자 되기 전략은 현실적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열림터에 사는 동안 나현과 소라는 ‘마음이 아프다’는 이유로 직장이나 학교를 쉽게 빠지고, 정해진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다. 과외 공부를 하다가도 옛날 생각이 난다며 울어 활동가들을 놀라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나현이 활동가들에게 거짓말한 것이 밝혀져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러자 나현은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이 더 의심받고 더 혼나게 될 것이 두려워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현은 아빠에게 늘 솔직하게 말했을 때 더 많이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빠에 대한 분노감에 더 힘들어 하곤 했다.

     
    이처럼 피해 경험과 밀착된 생활상의 문제들이 생길 때, 후유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울, 분노, 타인에 대한 불신감 등의 후유증은, 다른 면에서 보면 지각과 거짓말일 뿐이다. 그리고 지각과 거짓말이 성폭력 피해와 정말 관련 있는가 보다는 생존자들이 보이는 반응이 집에서 체득한 생활 방식과 밀접한 연관성과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생존자들이 집에서 체득한 생활 방식은 집을 벗어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유일한 보호자인 가해자는 피해자의 잘못을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성관계를 요구하거나, 성폭력 사실이 알려 질까 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차단한다. 학교에서는 학습이 부진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아, 긍정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친족성폭력 피해자는 사회적 규칙과 규범을 준수하기보다는 어른들의 눈에 ‘걸리지 않는’ 것을 더욱 중요한 규칙으로 학습하게 된다.
     
    그러나 집을 벗어나면서 생존자들은 다른 사회적 역할과 수행을 요구 받는다. 절대 비밀이었던 성폭력 피해 경험은 이제 드러내고, 말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건이 된다. 또한 잘 피해다니기만 하면 문제가 없었던 규칙은 이제 잘 지켜야만 쉼터에 살 수는 규범으로 바뀐다. 집과는 다른 질서 속에 살기 위해 생존자들은 다양한 충돌과 갈등을 겪는다. 특히 이러한 충돌은 쉼터, 학교, 직업학원이나 회사와 같이 특정 규범이 강한 곳에서 더 두드러진다.
     
    충돌이 생길 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정말 다양하다. 열림터 활동가는 어떤 것은 피해와 분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 어떤 것은 힘들어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라고 설명한다. 당연히 ‘마음이 힘든’ 생존자와 활동가는 긴 ‘말싸움’의 시간을 갖는다. 이 ‘말싸움’은 생존자에게 자신이 놓인 환경과 그 규칙이 바뀌었음을 전달하고 해석하는 시간이다.

     
    생존자에게 피해 ‘이후’는 피해자임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다시 체득하는 과정이다. 이때 후유증은 피해 이후의 부작용이 아닌,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적응 반응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피해 이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후유증인가가 아닌, 어떤 변화된 삶의 조건 속에 놓여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성폭력 ‘이후’의 삶은 전보다 더 다채롭다

     
    생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바꿔가는가, 변화하는 삶의 조건에서 무엇을 체득하는가는 피해 이후 어떤 삶의 장에 놓이게 되는가와 밀접하게 작용한다. 열림터와 같은 쉼터에 살게 된 생존자들은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습득한 삶의 전략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집에서 생활할 때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으며 살기도 하고, 때론 쉼터 밖을 선택하여 그 이후를 모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선택이 무엇이든, 이제 생존자들 앞에는 ‘선택’이 놓여있는 것이다. 자유롭고 더 좋은 것이 아닐지라도, 다양한 삶의 전략을 체현하는 시간이 된다.
     
    성폭력 피해에서 벗어난 ‘이후’ 삶은 이전보다 더 다양하고 다채롭다. 성인이 되어 열림터에서 독립한 한 생존자는 매일 하나씩 가해자가 하지 말라고 했던 행동들을 해보면서 해방감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열림터에서 나간 지 2년이 지나고 나서야 심리치료를 받고 싶다고 찾아온 생존자도 있고, 다시 가해자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긴장감 있는 일상을 유지하는 생존자도 있다.

     
    생존자들은 피해에서 벗어난 이후 변화를 경험하며 자신의 피해 경험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동시에, 피해 속에서 구성된 한때의 삶의 전략을 다양하게 변화시켜 나간다. 이러한 생존자의 오랜 여정은 피해 ‘이후’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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