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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열림터 생활- 1997.12. 나눔터 본문

친족성폭력을 말한다

잊지 못할 열림터 생활- 1997.12. 나눔터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열림터 2011. 7. 3. 13:01

 1997년 한국성폭력 상담소 소식지에 실린 글입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햇살님이 열림터에서 생활하다가 퇴소한 후에 쓴 글인가 봅니다. 열림터가 햇살님에게 '작은 꿈'을 심어준 공간이었다고 하니 너무 고맙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되짚어보게 됩니다. 
 또 매일 일지를 쓰게 하고 알찬 프로그램을 깨알같이 짜서 내담자들과 나눈 열림터 활동가들의 열정과 분주함도 마음 한가득 전해져 오네요.

 햇살님! "좋은 모습만 보여주겠다고", "모두가 좋은 감정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햇살님이 열림터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애쓰셨을지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지금도 햇살님은 이미 충분히 좋은 분이실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너무 궁금합니다. 만나서 재잘재잘 수다 떨고 싶습니다.
 혹시나 이 글 보신다면 꼭 연락 주세요~ 02)338-3562/ yeolim94@hanmail.net


잊지못할 열림터 생활

햇살 (가명, 前 열림터 내담자)


나는 지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내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보통 친구들처럼 학교도 다니고, 공부도 한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이 가지지 않은 추억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 가정이 이만큼 자랄 수 있도록 해준 열림터에서의 생활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 나는 아버지에게 모질게 당하고 가족들과 함께 갈 곳 없이 거리를 방황하게 되었다. 솔직히 그때는 나도 초등학생이 아니라 중학생이라는 생각에 온통 새로운 생각이 한결같았다. 그만큼 그때의 현실은 충격적이었다. 집도 없고, 돈도 없고, 그야말로 거지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우리 가족에게 작은 꿈을 심어 주었던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열림터, 그곳에서 일하시는 여러 선생님들 덕분에 우리는 쉴 수 있는 공간을 얻을 수 있었다.

열림터에는 우리 가족 뿐 아니라, 나와 같이 피해를 입은 언니들과 친구가 있었다. 앞으로 함께 지낼 생각을 하니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나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겠다고 결심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생활 얼마 동안은 그리 즐겁지가 않았다. 5살 먹은 동생이 장난을 그치지 않아, 언니들과 친구들에게 미움을 사고, 저절로 우리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좋은 감정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생을 매일 꾸짖고 또 친구 선경이와 편지를 쓰면서 감정을 풀어 나가려고 애썼다. 그 후 우리는 모두 친해질 수 있었고, 가끔 근처 공원에 놀러도 가면서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언제부터였는지 우리는 아주 친해지게 되었다. 토요일마다 하는 집단상담때는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모두들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집단상담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모두들 일주일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었고, 또 잘못된 부분은 새로 깨닫는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열림터에서는 토요일과 일요일만 빼고 수업을 받았다. 비디오 감상을 하는 날에는 내용 이해가 되지 않아 쩔쩔 매거나, 만들기 시간에는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평소에는 노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다가도 수업 시간이 되면 모두 한 걸음씩 물러선다. 반면에 김병숙 선생님께서 오시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분주해지곤 했다. 선생님께서는 무척이나 깔끔하시기 때문에 그날 아침은 청소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내가 열림터에 한참 있은 후 민지와 주현이 언니가 들어왔다. 민지는 나이가 어려 동생과 잘 놀았고, 주현이 언니는 요리를 잘해 맛있는 반찬도 많이 만들어 주었다. 나는 두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함께 생활하다보니 장난도 치기 시작했다.

내가 열림터에 있으면서 가장 즐거웠을 때는 역시 추석 때였다. 그때는 여러 선생님들이 나오셔서 같이 게임도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다. 매일 비슷한 생활을 하다가 오락 프로그램을 하니 모두 적극적이고 즐거워했었다. 처음 보는 선생님도 계셨는데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추석이 지나고 며칠 후, 우리 가족은 열림터를 떠나야 했다. 막상 떠날 생각을 하니 모든 게 아쉬웠다. 특히 친한 친구 선경이와 싸웠던 적, 또 밥도 해보고 청소와 빨래도 해본 것들 모두 아쉬웠다. 더 잘할 수도 있었다고 후회도 해보았다.
우리가 떠나던 날, 선경이는 울어 버렸다. 그걸 본 나도 울고 싶었지만 울 수가 없었다. 우리 식구는 배웅을 받으며 열림터를 나섰다. 그 때, 내 기분은 꿈과 내 모든걸 열림터에 놓고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언젠가 꼭 다시 와보겠다고 결심했다.

지난 김병숙 선생님의 결혼식날 열림터에 갔다가 우리들의 우정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맨 처음 열림터에 갔을 때와는 달리 만나자마자 이야기 먼저 나누었다. 우리가 만난 것이 우연은 아닐까? 전혀 모르던 우리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지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헤어질 때에는 섭섭하고 만나면 반가울 수 있게 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함을 느낀다.

아직도 열림터에 있는 언니들과 민지는 또 누군가를 만나 사이좋게 지낼 것이다. 나는 열림터에서 두번째 가정을 이룬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들 너무 보고 싶다.

우리같은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만든 좋은 곳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너무 좋고 또 한편으로는 편안하다. 열림터에서 매일 써야 했던 일지를 읽어 본 나의 마음은 그동안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