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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이야기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열림터 2019. 5. 21. 14:56

나눔터 83호 <생존자의 목소리 ④>

 

나비 이야기 

 

 - 나비

 

 

일상회복 프로젝트는 성폭력 피해 이후 다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생존자가 직접 기획하고 실행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본 상담소에서는 2018년 황금명륜 회원님의 지정기부금으로 생존자들이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여행을 가거나 함께 하고 싶은 친구와 문화생활을 즐기는 등 일상 회복을 위한 활동을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김봄님의 후기를 전합니다.

 

2018 9 13일부터 11 8일까지 해피빈을 통해 진행된 <친족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세요!> 모금함은 목표금액 555만원을 달성하여 나비에게 직접 전달되었습니다. 모금에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나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모두들 안녕하세요? 저는 스물 두 살, 2017 8 24일에 열림터를 퇴소한 나비 에요. 소식지에 첫 글을 실어보려고 하는데 지금껏 저를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저에 대한 소개를 구체적으로 한 적이 없다는 생각에 23년간의 제 삶과 퇴소한 이후의 여정을 말씀드릴까 해요. :-)

 

저는 가정 내 친아빠의 성폭력과 친오빠의 구타, 폭행 그리고 나머지 여자 가족들의 방치로 2016 6 9일 입소하게 되었어요. 원래 며칠 더 늦게 입소하려고 했는데, 동생에게 가출 계획을 들킨 걸 제가 바로 눈치 챈 날에 불가피하게 가출하게 되었어요. 증거물들을 가득 넣은 큰 상자를 하루 종일 들고서 돌아다니던 입소 첫 날이 생각이 나네요. 열림터에 들어와서는 바로 친아빠의 성폭력에 대한 법적 고소를 시작했어요. 또한 바로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해보기도 하고, 얼마간 갈 길을 찾지 못해 방안에서 인생에 대한 고민과 절망 속에서 헤매다가 마음을 먹고 수능 준비를 했어요. 대학에 가면 학자금 대출을 받고 생활비를 벌며 학업을 이어가겠다는 생각으로요.

 

스물 두 살이 되던 해, 저는 17년도 수능 결과를 토대로 지원한 서울에 있는 전문대학에 모두 합격하여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어요. 그러려면 제가 모 장학재단에 제출해야 할 서류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상담원들은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안내하는 평범한 서류와 달리 조금은 특별한 제 경우에 해당되는 서류안내는 낯설었던지, 서류 제출 마감 1분 전까지 열 몇 분께서 모두들 제게 잘못된 서류들을 알려주셔서 합격한 모든 대학의 입학은 물거품이 되었어요.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 쉼터 퇴소자에게 지원해주는 자립지원금 500만원은 갑자기제 순서부터 성인 입소자에게는 주지 않을 거라는 방침이 내려왔어요. 저는 혈혈단신에 이런 상황을 대비하지 못한 채로 몇 달 후 퇴소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어요. 얼마 동안 이 상황에 대한 무서움에 멍해있다가 정신을 차린 저는 다시 일어나, 점차 쓰리-(일터 세 곳에서 근무하는 것)과 수능 재도전을 시작했어요. 그 당시 롤모델은 새로 입소한 만두였어요. 만두가 궂은 상황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반드시 이 상황을 뛰어넘으리라!’ 다짐을 했어요.

 

퇴소를 하고는 경제활동을 하는 저소득측 여성 대상 쉐어하우스에 입주했답니다. 한 구석에는 상자들이, 한구석에는 책상이, 나머지 한 구석에는 옷걸이가 있던 그 집은 저의 첫 번째 소중한 보금자리였어요. 저는 평일에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주말에는 화장품 가게에서 알바를 했고, 남은 시간에는 피부 임상시험 알바에 공고가 올라올 때마다 지원했어요. 그리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17시가 되면 1시간 자고 일어나, 작은 책상 앞에 앉아 바로 수능 공부를 시작했어요. 23시가 되면 반드시 잠들었고, 아침에는 편의점에 출근할 지하철을 잡기 위해 5시경에 일어났어요. 밥은 편의점에서 가져온 식품 폐기물들을 밥그릇에 비벼 먹었어요.

 

쓰리-잡을 시작한 이래로 통장에 월급이 찍힐 때마다 저는 돈이 점차 많아져도 긴장을 풀지 않고 안심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며 목표를 떠올렸어요. 월급이 쌓일 때마다 기뻐하는 한편, ATM기의 작은 거울에 비춰진 지친 얼굴과 낡고 헤진 신발에 미안했어요. 그래도 그렇게 열 달의 시간을 보내다보니 천 만원을 모았고, 18년도 수능을 보게 되었답니다.

 

수능 당시 지진이 일어나 수능 시험 날짜가 연달아 연기되어서 EBS 교재들을 더 보았어요. 마침내 수능날, 열림터 목련샘의 지인이 해주신 따뜻한 죽 덕분에 든든한 마음으로 그날 수능을 무사히 잘 치뤘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노랗고 붉은 노을이 참 예뻤고, 긴장이 풀리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물이 흘렀어요.

 

제가 지원한 학과들은 전부 현실적으로 선택한 간호학과였어요. 저는 대입 면접을 홀로 준비하고자, 아르바이트가 끝난 뒤면 도서관 휴식공간에서 22시까지 연습했어요. 공책에 각 대학 사이트의 면접 예상 질문들을 하나씩 쓰고답변을 준비하고, 휴대폰 카메라의 녹음 기능으로 저의 말을 다듬고, 면접장에서 있을 입장부터 퇴장까지를 동영상으로 찍으며 각본대로 연습했어요. 2주간 지방 곳곳에 면접을 보러 다녔고, 합격한 대학 중 제가 선택한 곳은 대학병원이 있고 재단 장학기금이 풍족한 곳이었어요.

 

저는 이제 간호학생 나비 에요. 공부와 과제의 양이 많고 아르바이트도 힘이 들지만, 저의 소중한 꿈과 미래, 그리고 사랑하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열심히 해야겠죠? 이렇게 살다 보면 서울로 다시 돌아와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을 제가 되어 있겠죠? 제가 희망을 가지고 앞을 향해 나아가, 구하는 것을 스스로 찾고 얻으며,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노력한다면 말이에요.

 

최근에 어떤 책을 읽었는데 이런 내용이 나와요. 어떤 사람이 죽은 뒤 하늘에 올라가보니 천사들이 선물을 포장하고 있더래요. 그것도 아주 두껍고 단단하게 칭칭 포장을 하는데, 그 사람은 천사에게 왜 그렇게 선물을 포장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대답하기를, ‘하늘나라에서 땅에 있는 선물 주인에게 선물이 전달되기까지 과정이 험하고 거리가 멀어서 그렇지요.’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이 선물 속 내용물은 행복이고, 포장지는 고난이랍니다.’

 

여러분, 제 긴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저를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이 글을 빌려 이루 말할 수 없이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을 드려요. 모든 분들이 행복하고 건강하시기를, 좋은 일들이 가득하고 힘든 일도 잘 헤쳐나가시기를 바라며 <나비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모두 모두 사랑해요.:-)

 

* 생존자의 목소리>는 연 2회(1월, 7월) 발간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소식지 [나눔터]를 통해서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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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ksvrc.tistory.com/875 [뛴다! 한국성폭력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