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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숙직 일기

[숙직일기] 잔소리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열림터 2023. 3. 21. 19:39

잔소리, 좋아하시나요?

‘잔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싶지만, 저는 잔소리가 정말이지 싫은 사람입니다. 원가정에서 수많은 잔소리를 듣고 자랐거든요. 예컨대, 걸음걸이 하나하나에서부터 “등을 쫙 펴고 걸어라”, “머리는 뿌리부터 말리고 뻗치지 않게 안쪽으로 말아서 두어라” 와 같은 말들이요. 어떻게보면 인생의 꿀팁으로 가득 찬, 디테일이 살아있는 조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매순간이 가르침의 연속이고, 나누는 이야기들마다 꿀팁들로 범벅된 꿀단지라면 마냥 달게만 느껴질까요? 그렇게 저는 잔소리로부터 해방을 꿈꿨고, 성인이 되어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는데요. 잔소리를 업으로 하는 열림터 야간활동가가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잔소리를 업으로 하는 야간활동가

 야간활동가의 주요 업무는 숙직입니다. 오후7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생활인들과 함께 생활하죠. 이 시간동안 잔소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식사 당번을 하기로 한 이가 등장하지 않을 때, 밥을 먹고 설거지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이물질이 남아있는 식기도구를 볼 때, 약을 챙기지 않은 생활인에게 약을 먹자고 채근할 때, 작은 청소를 얼렁뚱땅 한 이에게 이것저것을 다시 하라고 할 때, 취침 전 세수와 양치를 하지 않은 생활인을 화장실로 들여보낼 때, 잔소리 할 일은 상황에 따라 끝도 없이 펼쳐집니다. 생활인들에게 잔소리를 할 때면 저의 잔소리 체력은 금세 방전되고, 그러다보면 정작 생활인들과 신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에너지는 부족하게 됩니다.

잔소리 체력

 아침 8시 퇴근 시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동료에게 잔소리하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호소하기를 몇 번. 은희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요, 은희샘은 “잔소리도 체력”이라고 했습니다. ‘잔소리 체력’이 유독 안 좋은 사람들이 있다고. 무거운 거를 들거나 몇 시간을 걷는 것보다 잔소리 한 마디에 기가 쪽 빠지는 사람들. 은희샘과 저는 그런 사람이라고요. 

잔소리가 끔찍하게 듣기 싫었기 때문일까요? 잔소리를 하기도 싫었던 저는 잔소리를 하게 될 상황이면 정말이지 꾸욱 참고 참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톤으로 차분하게 말(잔소리)을 하려고 노력을 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홧병(ㅋㅋㅋㅋㅋㅋ)이 생기게 됩니다. ‘그냥 내가 하고 말지’ 하고 치워버리기도 하고, ‘언제 씻나 보자’ 하고 기다리다가 더 화가 나는 상황들이요. 그러다보니 잔소리를 할 때면 답답함과 함께 화가 압력밥솥처럼 살짝살짝 새어나오는데요, 그러면 안되니까 바깥으로 새나오는 화를 컨트롤 하는데 많은 에너지가 듭니다. 정말 잔소리는 체력인가봅니다. 

지시와 잔소리 그리고 비난 사이

최근에 들은 한 상담가의 팟캐스트에 의하면 잔소리는 여러 의미로 쓰이지만 그 핵심은 ‘반복성’과 ‘지속성’에 있다고 합니다. 잔소리는 하는 이와 듣는 이가 모두 습관적이라고요. 잔소리에는 행동적인 결과가 없고, 그저 반복되는 소리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잔소리라는 말을 혼용하고 있지만, “이것을 해라”라고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은 ‘지시’이고, 지시를 비효과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잔소리’이며, 더 나아가 지나친 이야기들(전체를 싸잡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비난’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시

하는 것- 예를 들어, 학교를 다녀온 이에게 “잘 다녀왔어? 너 오늘 학교 다녀와서 수학학원 갔다가 다음 날 영어 학원 숙제해야하는 거 알지? 빨리 손 씻고 밥 먹자! 너 5시에는 출발해야하는데 수학학원 숙제는 했어?” 하는 일과에 대한 순서를 읊어주는 것 -을 잔소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담가는 이것이 잔소리가 아니라고 했는데요. 일과에 대해 지시하는 것은 생활습관이 들기까지 양육자가 해야하는 일이고, 훈육을 위해 필요한 것까지 잔소리라고 생각해버리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비난의 영향력을 강조하며 잔소리와 비난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말에 주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을 조장하는 잔소리는 평생 위축감을 남길 수 있다고요. 예를 들어, “너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라는 말을 계속 반복적으로 들은 이는 “그래, 내가 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생각하게 됩니다. 말이 갖는 힘은 참 큽니다. 어떤 말을 반복적으로 들으면 우린 그 말 안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 말이 잔소리가 아닌 지시에 가까운(현실에서 지시와 잔소리가 뚜렷하게 구분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말이라고 생각하자 한시름 놓이면서도 잔소리나 비난을 했던 날들이 떠올라 부끄러워졌습니다. 왜 그 말들이 상대의 행동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을까 고민도 되었고요. 지시가 자발성을 떨어트리기 때문일까 생각도 해봅니다. 분명 공부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누군가 방으로 와서 공부하라는 소리를 하면 공부가 하기 싫어지듯이요. 습관이 덜 형성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앞으론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야겠습니다. 비난을 하지 않고 효과적인 습관형성을 도울 수 있도록 체력도 길러야겠습니다. 저에게 스스로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행복한 것을 많이 많이 해주면서요! 


                                                                                                                                                              열림터활동가 상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