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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 다녀와서 _ 돌고래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열림터 2011. 8. 13. 14:27

 

이번 희망버스에 참가한 후기를 써야 하는데 참 막막하다. 뭐라고 써야 할지.. 흠흠. 그래도 한 번 마음 가는대로 써봐야겠다.

우선 난 노동자들의 삶을 위한 투쟁이라는 , 눈물겹고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마음을 갖고 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열림터에서 불가능한, 외부에서의 1박 2일을 보낸다는데 설레었고, 내 고향 부산을 간다는 데 설레었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집회에 직접 참가해보고 싶었는데 이런 나의 호기심 충족을 위해서 참가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랑쌤께 희망버스를 함께 타고 갈 거라는 말을 듣기 전에는, 김진숙에 대해서도 희망버스나 한진중공업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관심도 없었다.

 

출발하는 날이 되고, 시청광장 근처 집결지에서 성소수자지지연대 버스인 퀴어버스에 올라탔다. 퀴어버스 리더는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에서 내가 제일 맘에 들어했던 장병권님이었다. 내 눈앞에 존재하고 함께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버스가 출발하고, 버스 안에서 참가자 모두들 자기소개를 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좀 자다가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또 자다가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랑쌤이 휴게소마다 먹을걸 사주셔서 마음이 넉넉해져 그나마 버틸 수 있었지, 아니었다면 정신적으로도 빈곤해져서 두 배로 힘들었을 것이다.(이유는 제가 돈을 모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입니다..)

부산에 도착했을 때, 거기서부터 성당까지는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해야한다고 했다. 몸도 가방도 바이올린도 태양볕도 여름공기도 모두 무거웠다. 버스로 이동하면서는 부산시민들의 얼굴을 봤고, 매대에 올라져있는 생선들을 봤고, 거리에서 종대를 맞추는 전경들을 봤다. 헉. 검정색 갑옷같은 옷으로 무장한 전경들이 너무 무서웠다. 역사시간이나 뉴스에서 봤던 육탄투쟁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맞아 죽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눈물도 좀 맺히고, 나랑쌤한테, 남자친구한테 무섭다고 얘기하고 애써 안심하려고 노력했다.

 

 

 

성당에 도착했을 때, 모든 연대가 미사를 드리러 간다는 코스프레로 전경을 뚫고 지나가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성당으로 들어와 성당 마당에 앉았다. 밥이랑 김치로 저녁을 해결하고(밥이랑 김치만 먹어도 꿀맛이었다.), 돗자리에 서로 얼굴을 터가며 아직은 서먹하고 수줍게 앉아있었다. 난 무료하고 연습도 할 겸, 아까 오는 길에 버스에서 노래로 연습했던, 이번 희망버스의 주제가를 바이올린으로 연습했다. 어머나, 돌아와요 부산항에, 랑 또 다른 하나는 이름을 모르겠네... 이렇게 세 곡을 개사해서 부르기로 한 것이었다. 아직 바이올린이 서툴러서 끽끽 소리도 나고,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도 있었고, 처음엔 모두들 들을 생각에 부끄러웠지만 점점 켤수록 연주하는 게 재밌었다. 깜깜한 마당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노래를 연주하는 것이 뿌듯하고 기뻤다.




그렇게 쉬다가, 어떤 지시가 떨어져서 다 같이 거리로 나가 차도에서 줄을 섰다. 그리고 다 같이 이동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때 난 행진하면서 바이올린 연주는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멋지게 연주하면서 행진할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큰 대로에 모두들 열을 정비해서 앉았다. 누군가 나와서 투쟁구호를 선창하고, 자유발언을 했다. 난 구호외치는 게 처음이라, 열심히 외치고 있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어디서 배웠을까 싶어서. 특히, 나랑쌤. 갑자기 그대가 위대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굳건하게 외치는 모습, 오~ 어디서 많이 해본 솜씨였다. '아 나랑쌤은 투쟁가였어'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이후부터는, 자유발언 자유공연이 이어졌다. 나의 성격에, 가만히 앉아있는 게 너무 지루했다. 그래서 무대 앞까지 걸어나갔다가, 폴리스라인 가까이 갔다가, 그걸 조금 넘겨서 전경 친구들 오빠 삼촌도 보고왔다. 마침 아오리 감독도 오셔서, 함께 자유롭게 그 주위를 돌아다녔다.

 



새벽 세 시 쯤이 되자. 너무 지치고 피곤했다. 아오리 감독과 한의사 도희님과 나는 바다와 맞닿아 있는 시멘트바닥위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처음엔 로맨틱했는데, 새벽엔 너무 추웠다.



일곱시쯤 나랑쌤이 나를 깨웠다. 어디론가 이동을 할 거라고 알려주셨다. 이런. 피곤해 죽겠는데, 난 계속 그 시멘트 바닥위에서 자고만 싶었다. '밤을 샌 사람들도 있겠지?'하는 생각에, 나는 또, '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혼자 감탄하고, 거기서 나눠주는 도시락으로 아침을 먹었다. 가방을 쌌는데, 가방이 한층 무겁게 느껴졌다. 시청까지 버스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저 앞에서 전경들이 버스를 막아섰다. 그래서 우리는 언덕으로 골목으로, 가파른 부산 골목길로 기어올라 넘어가야했다. 버스로 이동하고, 걸었다가, 길을 헤맸다가 다시 무리들을 만나고 넷을 맞춰 경찰청까지는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택시 기사 아저씨께서는 경찰들이 희망버스참가자들 태우지 말라는 말을 했는데 자신이 누굴 태우든 경찰이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그랬다. 부산에 도착했을 때, '희망버스가 부산 경제 죽인다', '부산시민들은 희망버스 반대한다.' 플랜카드를 봤는데, 희망버스 타고 온 사람들이 대중교통이나 택시 이용하면 돈 버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부산 시민 전부다가 희망버스 반대하는 건 아닌 것 같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청에 도착했을 때, 빨간색 바탕에 하얀색 글씨체로 '너희는 고립되었다.'는 종이를 받았다. '이 무서운 말은 또 뭐지?' 의아스러워했는데, 세상에, 희망버스 연대자들이 시청을 둘러싸고 경찰들에게 이 종이를 보여주며 서있는 거란다. 대박. 이건 무슨 상황? 이런 상황을 생각해낸 사람도 대단하고, 진짜 경찰들이 두려워할 수도 있는 말을 들고 서 있을 사람들이 발칙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난 속으로 엄청 무서웠는데. 다함께여서 할 수 있는 행동들인 것 같았다. 다행히, 최루액 발사 같은건 없었고, 희망버스 해산 시간이 돼서 하나둘씩 경찰청의 횡단보도를 건너 희망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갔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데,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 둘이 서계셔서, 나랑 오매쌤이랑 아오리랑 다섯명이서 사진을 찍었다. 또, 두 줄로 서서 우리가 지나가는 길 양쪽에 서서, 우리가 지나갈 때, "수고하셨어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서 박수 쳐주시고 환호해주시는 분들이 있었다.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피로가 싹 씻기는 느낌이었다. 뿌듯하고, 기쁘고 상쾌했다. 별로 특별히 한 건 없는데,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누군가를 기쁘게 했고, 감사의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아마 내가 또 집회에 참가하게 되면 이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일 것이다. 또 다시 느끼고 싶어질 것 같다.



다녀와서 난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다음날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거려야 했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주체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더 능동적으로 생동감있게 참가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나랑쌤은 내가 희망버스 다녀와서 월요일에 일을 쉬었더니, 다시는 희망버스 같은 거 참여하자고 안 할거라고 그러셨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또 가고 싶단 말이예요 ㅠ!!" 농담이셨겠지? (핑계가 아니었고 진짜 휴식이 필요했고, 일은 원래 그만두고 싶었던 거였다.)

아무튼,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