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림터

열림터에서 2년을 보내고 본문

열림터 식구들의 목소리/식구들의 감상

열림터에서 2년을 보내고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열림터 2013. 6. 18. 00:04

 

열림터에서 2년을 보내고

 

돌고래

 

그러게 2년을 살았는데,

지난 2년의 시간동안 뭘 했을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짐을 싸고 새집으로 출발을 기다리는 전날에도 잠이 안 왔다. 아침이 돼서 조화 쌤이랑 공명 쌤이랑 여름 쌤이랑 나랑 쌤이랑 다 같이 짐을 차에 실어 넣을 때도 꿈꾸는 것 같았다. 열림터에서 뼈를 묻겠다며 장난치곤 했는데, 정해진 입소 기간 2년이 흘러가고 망원에 집을 구해 독립 준비를 했다.

열림터에서 지낼 때는, 11시 넘으면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 시간에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독립을 하니, 피곤해서 집에 일찍 일찍 들어간다.

 

열림터 2년을 되돌아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2년 동안 고소를 진행했고, 2년 동안 편입 준비도 해보고, 수능 공부도 해보고, 리치몬드에서도 일하고. 선생님들과 부딪히고, 친구들이랑 싸우고, 웃고 울고... 작은 말하기 다녀와서 실신할 듯이 울기도 하고... 2년 동안 다큐멘터리도 찍었다. 요가도 한 1년 했다.

 

문득 몇 가지 일들이 기억난다.

 

복옥 쌤과 나의 기억

처음에 열림터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려보면, 힘이 없고, 정신이 없어서. 방에만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오늘도 내일도 누워만 있었다. 쉼터에서 아무도 없는 집에 있을 때도 무서웠다. 아빠가 들어올 것만 같았다. 악몽도 꿨다. 아침에 일어나면 8시든 9시든, 숙직방에 계신 복옥 선생님께 달려갔다.

‘악몽을 꿨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아빠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요.’

선생님은 따뜻하게 들어 주셨다. 오늘도 내일도 모래도, 들어주셨다. 한 날은, 복옥 선생님께 서운한 것이 있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선생님 하신 말에 마음이 콕 아팠다. 나는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기가 무서웠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무서운 것을 담아 두고는, 예전처럼 선생님을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에 뭔가 막히는 것이 있었다. 나는 편해지고 싶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불편함을 털어버리고, 선생님과 다시 편해지고 싶었다. 선생님께 솔직하게 털어놨다. 선생님은, ‘아 그랬구나, 쌤이 그랬어?’하고 놀라신 것 같았다. 며칠 뒤에, 선생님께서 돌고래가 서운한 거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주셨다. 그때 맘이 따뜻해지고 안심되었다. 감사했다.

 

송미헌 쌤과 나의 기억

작은 말하기 모임에 갔다. 몇 번 째 작은 말하기였는지 모르겠다. 가족에 관한 얘기를 하고 왔다. 3시간 정도 진행되는 이야기 모임인데, 그날 따라 온몸에 긴장을 하고 있었다. 맨 마지막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했나. 열림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카페에서 모임이 일어난 터라. 나는 한달음에 열림터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문을 열고, 거실문을 열었을 때. 난 그 자리에서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동생들이 달려왔다. 송미헌 선생님도 달려왔다. “돌고래야 무슨 일이니, 응?” 나는 울면서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울었다(울음이 나와서 설명할 수가 없다는 의미의 절레절레였다). “응, 그래. 말 안 해도 괜찮아, 실컷 울어, 울어버리자.” 그렇게 나는 선생님 허벅지에 누워서 울었다. 소리를 지르고,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울면서 내가 기절해 버리기를 바랐다. 그냥 울다가 너무 힘이 빠져서 기절해 버리기를 바랐다. 그냥 죽어버려도 괜찮으니까 이 고통이 끝났으면 바랐다. 그래도 나의 정신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힘이 빠지는 듯 정신을 잃을 듯 희미해졌지만, 끝까지 내 정신은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깨어있어. 나는 여기에 있어.’ 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실컷 울었다. 편하게 실컷 울게 해준 선생님이 고마웠다. “그래, 네가 거기 가서 얼마나 힘들었니.” 하고 말해주셨다. 허벅지를 베게 해주시고, 울라고 말해주신 선생님이 고마웠다.

 

공명 쌤과 나의 기억

○○ 변호사 사무실로 가던 길이었다. 공명 쌤이 너 아직도 준비 안 했냐고 빨리 나오라고 하는 말에 전화를 끊고 나갔다. 머리를 말리고 있었는데, 폰 너머로 들려오는 선생님 목소리가 불편했다. 그래도 내색 안 하려고 애쓰며, 함께 걸어갔다. 함께 걷는 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나는 선생님의 무슨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그저 그 말을 듣는 순간 선생님이 너무 싫었다. 정말 선생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만 싶었다. 짜증이 났다. 나는 쌤과 함께 가는 곳으로 가는 방법을 몰랐다. 나는 생각했다.

‘나를 기분 나쁘게 한 선생님 없이는 목적지까지 갈 수 없다니. 나는 무력해. 나를 화나게 한 선생님이 나에게 꼭 필요하다니.’

이런 생각에 나는 화가 나서, 뒤도 안 보고 빠르게 걸어나가 버렸다. 혼자는 가고 싶어도, 길을 모르니. 상담소에 계신 토리 쌤에게 전화를 했다. “선생님, ○○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고 싶은데, 위치 아세요?”

나는 검색을 잘 못 한다. 아직도 자신이 없다. 그렇게 나는 화를 씩씩 내며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고, 사무실에 앉았다. 이제야, 선생님을 마주보기가 두려웠다.

‘아.. 먼저 달려가 버려서 혼내실 건가... 어떡하지...’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곧, 공명 쌤이 들어 오셨다. 선생님은 웃는 얼굴이었다. 웃는 얼굴을 본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 안 혼낼 건가... 난 괜찮을 것인가...’ 멍해지고 쑥스러워서 선생님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쌤은 별말 없이, 그냥 앉으셨다. 그리고 선생님과 나는 변호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선생님을 마주하는 나는 쑥스러웠다. 선생님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지하철로 돌아와 헤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선생님께 미안해졌다.

“선생님 미안해요.”

공명 쌤은 괜찮다고 말씀하시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내가 요것만 써서 그렇지, 실제로 나와 2년을 산 선생님들은 속이 터져나갔을 일이다. 아주 속은 새까맣게 타고, 흰머리는 다섯 개가 났을지도 모른다. 아, 나도 괴롭다.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힘들거나 괴로운 게 힘들다. 적고 보니 자책을 하게 된다. 가슴이 아프다.

 

독립을 하게 되니, 밥 차려 먹는 게 일이었다. 지금 잇병이 4개가 생겼다. 이 개수는 기록이다. 돈도 없고, 몸은 피곤하고, 머리도 아프다. 힘든 부분을 쓰다 보니 독립생활에서 ‘괜찮은’ 부분이 떠오른다. 일단, 중고매장에서 산 분홍색 장롱도 마음에 들고, 나만의 전신 거울도 있다. 공명 쌤이 주신 하얀 책상에 노트북으로 글도 쓸 수 있고, 컴퓨터에다 그림 그릴 수 있는 타블렛이 있다. 노래하고 싶을 때 반주를 할 수 있는 통기타도 있고, 연습할 수 있는 나만의 바이올린도 있다. 며칠 전에 사온, 전자파 차단해주는 미니알로에가 있고, 분홍색 전기장판도 있다. 작년 한해보내기 행사에서, 2012년의 소원은 ‘내 인생의 조종사’가 되는 거라고 무대에 나가서 발표했었는데, 소원도 이뤘다. 따로 적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에 따뜻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이 많다. 쌤이나 친구들의 예쁘다는 말 한마디, 피아노 연주가 듣기 좋다는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고, 자신감을 얻었다. 싸우고, 화해도 해보고, 관계를 다져나간 경험이 나한텐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제 독립한 지 3주다. 아직 생활이 위태위태하다. 어딘가 가게 되면, 동네가 낯설어, 찾아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 밥 차려 먹고, 일어나고, 시간 맞춰 가는 것도 힘들다. 잠자는 시간이랑 일어나는 시간을 정해놓을까 싶기도 하고, 에이, 그냥, 어설프게 살지 싶기도 하다. 책상 쪽 벽에 붙여둔, 토리 쌤이 적어준 <돌고래 생활 십일계명>이 든든하다.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몰랐는데,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게 든든하고, 강제 강령이라 강령대로 따르고 확인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다.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많은 관심과 격려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열림터에서 2년의 세월은 다신 경험하지 못할 값진 시간이었다. 친구들의 치유에 힘써주시는 선생님들, 열림터에서 살아가는 친구들 모두 보고 싶고, 함께 해줘서 고맙다.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 지 모르겠다. 그저 늦게 드려서 죄송할 뿐이다.

요즘은, 스케쥴이 비는 시간에 비폭력 대화나 랭귀지 캐스트에서 만난 사람들을 하나둘씩 만나고 있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가고 밥을 먹고 얘기한다. 그 사람들이 밥값을 내준다. 내가 그들과 함께 얘기하고 집 바깥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 너무 고맙다. 외로운 마음에 풍성하고 다양한 울림이 울려 퍼진다. 희망도 생기고, 살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앞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돌고래이길 바란다. 넓고 자유로운 공간을 헤엄치다가 외로우면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기억이 되어주는, 열림터라는 공간에 감사하다.

나는 이제 자야겠다.

나중에 또 봐요,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