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림터

쉼터 퇴소 후 홀로 서야하는 차가운 현실 본문

친족성폭력을 말한다

쉼터 퇴소 후 홀로 서야하는 차가운 현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열림터 2013. 12. 17. 13:57

쉼터 퇴소 후 홀로 서야하는 차가운 현실
‘친족성폭력’ 이야기⑦ 자립을 위한 몇 가지 조건

조화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다’는 수아
 
수아는 작년 겨울 열림터에 입소하였다. 청소년 쉼터에서 지낸 3년 동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난하게 생활하다, 퇴소하고 1년간 고시원에서 혼자 지내던 수아가 자신의 생활을 꾸리는 것에 어려움을 겪어 다시 열림터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친부의 학대와 성폭력으로 언제 또 피해를 입을까 가해자의 눈치를 살펴야했던 수아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늘 불안이 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기 일쑤였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이라도 부정적이면 쉽게 상처받았다. 이 때문에 아르바이트 하는 동안에도 손님이 앞에 서 있으면 긴장이 되어 돈 계산을 제대로 못하거나, 손님이 갑자기 질문을 하는 경우 당황하여 아무런 대답을 못하는 등의 상황이 벌어져, 한두 달 일하다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 정은의 일러스트 [Growing] 중에서  © 일다
수아는 자신이 일을 꾸준히 하지 못했던 데에는 “전에 살던 쉼터 선생님들이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도와주셨고 마치 온실 속에 화초처럼 보호해주셨기 때문에, 나는 피해자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였다” 라고 진단했다. 타인에게 의존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습관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성폭력피해자라는 이유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감싸주었던 청소년 쉼터 선생님들의 보호 태도가 반복되면서, 수아는 쉼터 생활 이후 자립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에 집중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수아는 혼자 살게 되면서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탓을 했지만, 상황이 반복되면서 자신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좌절감을 느꼈고 점점 무력해졌다. 그래서 열림터에 들어오면서 가장 도움 받고 싶은 부분이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했다.

 
수아는 열림터 후원회원이 운영하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기회가 생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쉽고 사소할 수 있는 일들 하나하나까지 활동가들과 함께 연습했다. 손님맞이 인사부터 전화를 걸고 받는 법, 주문받기와 계산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예비연습까지 하면서 실전에 대비했다. 몇 번의 좌절과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후원자의 이해와 기다려줌, 꾸준한 상담과 치료, 그리고 열림터의 적절한 지지 덕분에 아르바이트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요가지도자 과정을 밟고 있는 한영이

 
열림터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생존자들이 가장 먼저하는 것은 ‘일상의 회복’이다. 특히 친족성폭력 피해를 겪은 생존자는 언제 성폭력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긴장하며 지내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쉼터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희망진로가 있는 생존자라면 자립에 관련한 지원을 시작하기 수월할 수 있지만, 열림터에 입소하는 생존자들은 가족 안에서의 학대와 폭력을 견디며 사는 것만으로도 힘겨웠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잘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할 겨를이나 기회를 갖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열림터에서는 생활인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알아가고 진로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고민한다. 올해에는 ‘진로 및 적성 탐색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진로 코칭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생존자들이 개인별로 적성을 탐색해보고, 그것을 직업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현재 자신의 상황에 맞는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워보았다. 마지막 시간에는 함께 모여 꿈과 희망, 갖고 싶은 직업에 대해 발표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한 책임감도 되새기고, 다른 이들의 응원도 받았다.

 
열림터 생활인 한영이는 이번 진로적성 프로그램에서 상담을 통해 요가를 제안받았다. 한영이는 요가 체험수업을 다녀온 후 흥미를 느껴, 지금은 요가지도자 과정 수업을 듣고 있다. 한영이는 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온 후 카페 서빙 등 아르바이트 외에 다른 일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요가를 시작하며 적성을 찾게 되고 규칙적인 운동으로 몸도 건강해져서 자신감이 부쩍 늘었다.

 
한영이가 열림터의 다른 생활인들에게 가끔 요가도 알려주며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한다. 한영이의 변화된 모습에 다른 생존자들도 자신의 진로 찾기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열림터 생활인들의 ‘꿈 찾기’ 노력들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혼자서 막막하기만 한 퇴소 후의 생활

 
성은이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열림터에 들어왔다. 사회복지사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성은이는, 진로상담 뒤 사회복지학과로 대학 진학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은이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퇴소하고 싶다고 말했다. 열림터에서 나가 보다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던 성은이는 대학교 진학을 조금 미루겠다고 했다.

 
퇴소 후 1년이 지난 후 만난 성은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지내고 있었다. 서울에서 비교적 집값이 저렴한 곳에 원룸을 구했지만 월세와 공과금, 핸드폰 요금, 생활비까지 감당하기 버겁다고 했다.

 
또, 혼자 살면서 안전에 대한 불안은 점점 심해져 가는데, 그렇다고 더 안전한 집으로 이사하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느라 자신의 미래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한, 성은이가 아르바이트 말고 다른 진로를 생각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또 다른 퇴소자인 진아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자립하였다. 평소에 공부를 잘했던 진아는 꿈을 이룰 수 있다며 몹시 들떠 있었다. 다행히 첫 학기 등록금은 진아의 고등학교 선생님과 열림터 후원자의 후원금으로 장만했다. 하지만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다보니 장학금을 계속 받지 못했고, 결국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2학년이 되면서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를 무리한 탓에 건강이 악화되어 생활비와 병원비를 마련하는 일이 더 시급한 상황이 되었다. 열림터에서 생활할 때는 시설수급자로 의료급여 혜택을 받아 장기적으로 아픈 곳을 치료 받았지만, 퇴소 이후에는 병원비가 부담스러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몸이 아프면서 진아는 ‘성 판매’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다. 대학 학비 마련이 쉽지 않아서 고민했던 것이다. 진아는 자신을 도와주는 가족이 있었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거라며 속상해했다. 가족이 없기 때문에 방황하거나 실패할 권리조차 없다며, 잠시도 아르바이트를 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힘들어했다. 진아는 조만간 열림터에서 함께 생활했던 친구 집으로 이사할 예정이다. 생활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한 결정이다.

 
▲ "퇴소자들은 자립 이후 고질적인 외로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정은의 일러스트 [성장 정원]  © 일다
저마다 처한 환경과 자원의 차이가 있지만, 성폭력생존자들이 쉼터 퇴소 이후 혼자 살면서 겪는 어려움은 유사하다. 퇴소자들은 자립 이후 고질적인 외로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일상적으로 연락하며 지내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족을 막연하게 그리워하면서도, 가족관계 안에서 성폭력피해를 입은 자신을 외면하는 가족들을 원망하기도 한다.

 
열림터를 퇴소한 성은이도 이런 외로움이 크지만, 자신의 상황을 깊이 설명하기 어렵다 보니 주변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20대 초반의 또래들과 다른 조건에 놓여있는 자신의 모습에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도 힘이 되어주는 것은 열림터에서 함께 살았던 퇴소자들과의 커뮤니티이다. 서로에게 가족이나 친척을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인 것이다. 명절에 함께 모인 몇몇 퇴소자들이 차례음식을 배운 적이 없어 비슷하게 흉내를 내고, 일회용 용기에 담아 차례를 지내며 함께 울었다는 소식은 활동가들을 안타깝게 했다.

 
주거, 의료, 직업훈련…사회적 지원이 필요해

 
규칙과 프로그램이 있는 공동체생활인 쉼터의 삶 속에서 생존자들이 답답함을 느끼거나 자유롭게 자신만의 삶을 꾸리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생존자의 욕구는 존중되어야 한다.

 
또한 쉼터 정책 상, 생존자가 원한다고 해서 쉼터에 계속 머무를 수 있지도 않다. 따라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은 생존자들의 당면 과제이며 쉼터 퇴소 이후의 삶이 자립이 될 수 있도록 조건을 갖춰야 하는 것은 ‘사회의 과제’이다.

 
2011년부터 성폭력피해자 쉼터에서 일정 기간 생활하고 퇴소하는 경우에 퇴소자립금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자원이 전무한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의 장기적인 자립을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지원이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시작되는 자립은 거주지에 대한 불안, 경제적 곤란 등이 가중되다 결국 학업 중단이나 성 판매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폭력피해 생존자들이 쉼터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들이 퇴소 이후의 일정 기간에도 지속될 수 있어야 한다. ‘자립준비 기간’을 쉼터에 거주하는 기간으로 한정해서, 퇴소와 동시에 사회적 안전망 바깥으로 급격하게 밀어내서는 온전한 자립이 어렵다.

 
‘주거권 확보’를 위한 지원도 시급하다. 성폭력피해 생존자들이 퇴소할 때 당면하는 가장 큰 문제가 살아갈 집을 구하는 것이다. 돌아갈 집이 없거나, 가족이 있더라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생존자들이 혼자 살아갈 안전한 주거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정부 차원에서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임대아파트나 임대주택에 거주할 수 있는 우선권을 제공한다거나, 목돈을 마련하기 어려운 피해자들의 경제 상황을 고려해 대출이자를 낮춰주는 등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퇴소자를 위한 ‘의료비 지원’도 일정 기간 이뤄져야 한다. 쉼터 입소 중에는 시설수급자로 의료급여혜택을 받지만 퇴소 이후에는 중단된다. 자립 후 피해자들은 대부분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혼자 살아가는 고된 삶 속에서 건강은 더 취약해지기 쉽다. 따라서 쉼터 퇴소 이후 일정기간 동안 의료지원이 지속되어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직업훈련 기관도 확충되어, 폭력피해 여성들이 자립을 훈련하고 준비하며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늘어나야 한다. 경제적 독립을 위해서는 일정 기간 준비를 거쳐야 하는데, 생존자가 갖는 취약성을 이해하지 않고 일정한 기간 동안 생존자의 적응을 기다려주지 않는 한, 생존자의 직업 활동은 경력이 쌓이지 않는 단기적인 시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자의 자립은 요원해진다.

 
‘자립’은 사회적 자원을 적절하게 선택하고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자립은 쉼터에서, 성폭력피해 생존자 혼자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계획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생존자들이 자립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퇴소를 이유로 사회적 지원을 단절하고 생존자에게 홀로 자립할 것을 요구하는 현행의 정책의 개선,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