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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터
열림터 신입활동가의 숙직일기 본문
돌봄은 아무나 하나
목요일, 작은 청소를 진행했다. 청소 구역 두 군데를 1시간 안에 해야 하여 마음이 바빠 생활인들이 청소를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볼 새가 없었다.
“쌤, 청소 다했어요!” 하고 쾌재를 부르며 Z가 왔다.
“배가 등딱지에 달라붙을 것 같아요!”하기에 얼른 뭐라도 먹으라고 하고는 쓰레기봉투와 분리수거 더미를 가지고 바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부엌은 언뜻 보기에도 H가 말끔히 청소를, 정리정돈을 해놓은 듯 보였다.
쓰레기를 버리고 오니, H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Z는 깨끗한 부엌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요리하고 있었다. 유투브에서 유행하는 음식이라고 하는데 냄새가 그럴싸했다.
“쌤, 이것도 몰라요?”, “저것도 모르죠?”, “쌤 뭐 알아요?” 하고 활동가를 늙은이 취급하는데 맛들린 Z보다 새빨간 고추장 양념이 가스레인지 이곳저곳에 닿는 것이 더 신경쓰였던 나는, 하지만 애써 쿨한 척 “잘 먹구 잘 치워야 해”하며 자리를 떴다. (뒤에서 쌤, 왜 이렇게 쿨한 척 해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Z가 마친 화장실 청소를 확인할 겸, 손도 씻을 겸 들어간 화장실에서 머리카락 몇 가닥과 조우했다. 저-기 구석 어딘가에 또 길게 늘어뜨러져 있는 머리카락. 맛있게 ‘요즘 요리’를 먹고 있는 Z를 호출하자니 이게 뭐 별거라고- 싶어 정전기포를 꺼내들었다. 바닥을 이리저리 훔치니 먼지와 머리카락의 합작품이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청소 대충 했고만?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어 화장실 곳곳을 살펴보니 세면대 밑에 엄청난 먼지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Z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릴 인내심은 없고 그냥 내가 해치워버리는 게 더 마음이 편하겠다 싶어 머리카락 뭉치를 하수구에서 뜯어내고 먼지들을 싹싹-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니, Z를 부를까 말까 갈팡질팡했던 마음이 후련해졌다.
11시쯤 체온계를 가지러 가다가 부엌을 한 번 쓰윽 훑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Z의 흔적이 빨갛게 남아있었다. 관자놀이를 조금 긁적이다가 이건 안되겠다 싶어 “Z! 우리 아까 부엌 깨끗이 치우기로 하지 않았어~?”하고 Z를 불렀다. Z는 대꾸하지 않다가 내가 방문을 두들기자 아 맞다! 하고 베시시 웃으며 자기 잘못이 아니라 자기 뇌가 까먹은 탓이라고 했다. 함께 나와서 그동안 강조해왔던 행주 걸이에 행주 빨아서 널기, 가스레인지 닦기, 쓰레기 버리기 등을 짚어주는데 Z가 정색을 하며 빨갛게 양념이 묻은 행주는 자기가 쓴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럼 누구냐고 묻자, “어이없어, 진짜.”, “누구래요?”, “저 진짜 아닌데요.” 하는 것이었다. 아까 화장실 청소도 그렇고, Z가 오리발을 내미는 거지 싶어서 “나도 어이없어 진짜.”, “양념장 튄 거 고대로 두고 진짜.”,“행주도 몇 번이고 말했는데 진짜.”하고 Z의 말투를 장난스럽게 따라하며 숙직방으로 자리를 피했다. 혹여 본인이 쓰지 않았어도 어련히 알아서 치우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Z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노랗고도 빨간 행주만 빼고’ 부엌을 치워놓았다.
노랗고 빨간 행주만 덩그러니 남겨진 싱크대를 보고 조금 화가 난 나는 다시 Z의 방을 노크하고 “ Z, 행주는 정말 저렇게 둔 거야?”라고 재차 물었다. Z는 화를 숨기지 않고 “제가 쓴 거 아니라고 말했잖아요.”라고 답했다. Z의 목소리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그럼 누구지? 나는 아니고. 너 밥 먹을 동안 아무도 부엌에 나오지 않았어.” 하고 나름의 합리적 추론을 하자 Z는 바로 H가 자신이 밥을 먹을 동안 내려왔다고. 자신이 쓴 게 아니니 H가 쓴 거겠죠.라고 몰아붙였다. 나도 지지않고 H에게 물어보겠다 하고 바로 격양된 목소리로 H의 방을 향해 소리쳤다.
“H, Z 밥 먹는 사이에 내려와서 행주 사용했어요??”
이미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서 우리의 대화에 귀기울이고 있었던 H가 단숨에 내 질문에 대답했다.
“그거 제가 그랬어요!”
“...”
침묵과 머쓱함이 나와 Z를 둘러싸고 있던 팽팽한 공기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거, 그거 그렇게 그냥 두면 안되는데...! 내려와서 치워주세요...!”
당황한 내가 침착한 척하며 말을 더듬다가 Z와 눈이 마주쳤다. 사과와 인정은 빠르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미안”하고 재빨리 사과했다. 진정성 있는 사과를 위해 이런저런 말들을 찾고 있는데 Z가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그냥 빨리 제 방에서 나가주세요.”라고 했다. 나는 꼬리를 내리고 머쓱하게 웃으며 “예..”하고 쭈구리처럼 Z의 방문을 조용히 닫아드렸다.
잠시 후 H가 나와 노란 행주에서 빨간 양념을 제거하고 물기를 쫙 짜서 탈탈 털어 행주걸이에 행주를 걸어두었다. 줄곧 Z가 범인이라고 의심했던 것이 미안하고 멋쩍어 괜히 “H, 언제 나왔어요? Z가 밥 먹을 때 나왔는지 몰랐네. 계속 방에 있는 줄.” 하고 주절거리니, H가 미소지으며 “안나왔어요.”한다. “엥? 그럼 행주는?”하고 물으니 “기억은 안나는데, 제가 부엌청소 당번이었으니까.. 그리고 싸우시는 거 같길래.”라고 한다. 아아.. H의 빠른 대답은 싸움(?) 말림용이었구나.
그리고 다시 행주 사건의 범인(?)은 원점으로.
결국 목요일 행주를 빨지 않고 시뻘건 양념이 묻은 채로 내버려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별거 아닌 일에 목소리 높인 것이 숭하고 부끄러워지다가도 별거 아닌 일이 자꾸 별게 될 것 같은 예감에 아찔해졌다. “어질러놓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지!”하고 소리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그 말을 듣던 때의 나는 그거 뭐 별거라고 소리치나- 하며 태평하거나 내가 어질렀는지 누가 어질렀는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거’슨 내 일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잔소리 듣기 싫어하던 내가 잔소리를 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고, 잔소리로 들리지 않게끔 고민하며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함은 물론, 아무리 합리적인 추측이라도 명탐정 코난이 아닌 이상 범인 확정은 금물이며, 나의 ‘잔소리’가 때로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림을 의미했다.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웰컴 투 공동체 생활. 줄곧 어질러 놓는 사람으로 살아온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모르겠음이다.)
신입활동가 상아 씀